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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일본 전국시대 통일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by 유니 히스토리 2022.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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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게 된 과정

일본 전국시대 세력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근 100년 동안 일본에서는 전국시대라는 혼란하고 수많은 전투와 전쟁으로 영웅들이

나타났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조선을

침공하였죠. 그렇다면 도요토미는 어떻게 권력을 잡게되었고 전국시대는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 어떤 인물들이 있었는

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전국시대를 통일직전까지 만들었던 오다 노부나가 출처 구글 이미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기전 도요토미가 모시는 주군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오다 노부나가이며, 서양의

화약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일본에게 맞는 조총으로 개량해 통일 된적이 없었던 일본을 거의 통일 직전까지 이끌어

던 쇼군 즉 지방 권력자입니다. 그런 그가 믿었던 충신에게 배신을 당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배신자를 처단함으로써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 계승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명분을 얻게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후 그의 첫째 아들 노부타다는 아케치 미츠히데와의 싸움에 패배하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첫째 아들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 후보는 둘째 아들 노부카쓰 셋째 아들 노부타카, 그리고 마지막 손자인 히데노부 이렇게

세 명 정도로 좁혀졌습니다. 이 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겨우 3살밖에 안 되었던 오다 히데노부를 지지합니다.

 

2. 도요토미파 vs 반 도요토미파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출처 네이버

어릴수록 자신이 내세웠을 때 휘두르기 편했기 때문이죠. 셋째 아들인 노부타카는 당연히 이 결정에 불만을 가졌고 그 결정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는데 그 결과는 실패하고 할복으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둘째 아들은 어찌 되었을까요?

도요토미는 오다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노부카쓰를 쫓아내 버립니다. 그리고 노부카쓰도 1583년 반기를 들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 속 노부카쓰가 후계자가 되는 게 마땅하다고 주장 한 인물이 있는데 그 유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보라색 도요토미파 세력 vs 파랑색 반 도요토미파 세력

결국 전쟁은 오다 히데노부를 등에 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오다 노부카쓰를 지원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결이 되었습니다. 도요토미파 vs 반 도요토미파의 탄생이죠. 이렇게 나뉜 두 진영은 일본 전국으로 확대해 나가기 시작하죠.

이후 고향이자 오다 노부나가가 세력을 키웠던 오와리의 북부지방에서 두 세력 간의 전투가 벌어집니다. 막상막하였던 전

투가 이어졌지만 승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됩니다. 도요토미는 어떻게 팽팽했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걸까요?

 

3. 도요토미가 히데요시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

전국시대 전국통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출처 국방TV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세에서 밀리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노부카쓰를 등에 업은 도쿠가와에게 모든 것을 뺏길 수도 있는 위기였죠.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하나의 꽤를 냅니다. 바로 오다의 둘째 아들 노부카쓰와 단

독으로 화해를 해버립니다. 결국 싸움을 이어나갈 명분이 사라진 도쿠가와도 할 수 없이 도요토미와 화해를 하게 됩니다.

그 후 도요토미는 오다 노부나가의 기존 세력과 그의 생전 넘지 못했던 지역까지 평정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후 일본 전국을 도요토미 세력권으로 만드는 한 편 도요토미를 약화시키기 위해 그의 근거지에서 벗어나 에도로 이동시킵니다. 이렇게 1590년 오다 노부나가도 이루지 못했던 전국 통일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뤄냅니다. 한편 도요토미에 의

해 에도로 쫓겨난 도쿠가와는 어찌 되었을까요? 도쿠가와가 강제 이주하게 된 에도는 당시에 늪지대였으며 인구도 매우 적

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도쿠가와는 이에 굴하지 않고 버려진 에도 땅을 농지로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천을 정비하고 제방을 쌓고 용수로까지 확보를 하면서 이에야쓰는 도요토미 다음으로 가는 부유한 영주가 됩니다. 훗날 도요토미가 이에야쓰를 에도로 보낸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패착이라고 평가를 합니다. 그때의 에도가 바로 현재의

도쿄가 되는 땅입니다.

 

4. 임진왜란 중 성행한 일본의 노예무역

일본의 조선인 노예 무역 출처 유튜브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의 사주를 받은 일본군은 조선인 납치를 일확천금의 기회라 생각하고서 화승총, 비단 등을 얻기 위해

조선인을 무작위로 잡아서 팔아넘겼습니다. 이렇게 끌려간 조선인들만 해도 약 10만여 명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이 끌려가고 난 뒤 참혹한 일상이 담긴 일기가 있습니다. 다 같이 보며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준비합시다.

 

"11월 19일 울산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노예 상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본진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돈을 주고 사서 줄로 목을 묶어 오리처럼 몰고 앞으로 가는데 잘 걷지 못하면 몽둥이로 패면서 몰아세우거나 뛰게 하였다."

-조선일일기-

 

포르투갈인들은 중계무역의 거점인 마카오, 나가사키를 통해서 조선인들을 서양에 노예로 팔아넘겼습니다. 그렇게 팔려간

조선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일본과의 전쟁이 길어진 이유는 명과 일본의 강화조약의 입장 차이라고 합니다. 도요토미 또한 예상치 못한 오랜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고 하네요. 명과 일본의 주요 강화조약은 아래와 같습니다.

 

-일본 측의 주요 강화조약 조건-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비로 삼는다.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할양한다. 조선의 왕자 및 대신을 일본에 보낸다.

포로로 잡고 있는 두 왕자를 석방한다.

 

-명나라 측의 주요 강화조약 조건-

조선에서 완전히 철병한다. 조선의 두 왕자를 송환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공식적으로 사과한다.

 

 

5. 1597년 정유재란 발발 및 도요토미 사망 그리고 도쿠가와의 전국 통일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쓰 출처 나무위키

결국 서로 눈치만 보는 상황 속 1597년 도요토미는 협상 결렬을 알리며 조선으로 2차 파병을 보냅니다. 이 전쟁이 바로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입니다. 1592년 첫 전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조선에도 이미 일본의 화승총을 본뜬

조선의 화승총이 보급되어 있었으며 의병과 이순신 장군의 활약과 명나라 군대의 제출병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1598년 어렵게 전쟁을 이어나가던 일본군이 갑자기 철수를 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사망하였기 때문입니다. 매독, 독살, 암살 등 다양한 설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죽음은 일본이 한반도에서 철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7년간의 한중일 전쟁이 막을 내립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비상시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최고 직책이었던 다섯 원로들에게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미래를 맡기며 눈을 감았습니다. 도요토미가 아들을 맡기며 남긴 유언은 무엇이었을까요?

 

"히데요리가 성인이 돼서 뜻을 이룰 수 있길 바라며 이 글을 다섯 사람에게 맡깁니다. 이밖에는 여한이 없습니다. 거듭거듭, 히데요리를 부탁합니다. 당신들 다섯 사람만 믿습니다." -1598년 8월 5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유언-

 

그리고 다섯 명의 원로 중 한 명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도쿠가와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래에서 수십 년간 굴욕의 시간을 참아온 인물입니다. 도요토미까지 사망한 이 절호의 기회를 도쿠가와는 놓칠 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도쿠가와는 일본 전국을 제패하겠다는 야망을 드러내게 됩니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도요토미에게 불만이 쌓였던

영주들도 도쿠가와를 지지하기 시작합니다.

 

 

6. 1600년 동서 전쟁 세키가하라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 출처 구글 이미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측근이자 가신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가 반 도쿠가와 이에야쓰를 주장하며 일본을 건 마지막 대결이

펼쳐칩니다. 바로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입니다. 이 당시 히데요리를 지지하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병력은 8만 명,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하는 병력은 약 7만 5천 명으로 비등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전투가 벌여진 세키가하라 지역은 옛날부터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였습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평원 지대였습니다. 도쿠가와는 병력을 둘로 나누어 이시다 미쓰나리 군대를 양쪽으로 포위할 계획을 세웁니다. 미쓰나리 역시 도쿠가와를 칠 계획일 세웁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세키가하라에서 대기 후 도쿠가와 군대를

코앞까지 유인하여 사방에서 공격할 계획이었습니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전쟁이 계속되던 그때 승기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미쓰나리의 공격 명령에 움직이지 않은 한 군대에 의해서 말이죠. 이렇게 도쿠가와의 군대를 사방에서 공격하겠다는 미쓰나리의 계획은 물거품이 됩니다. 도대체 그 영주는 미쓰나리 진영이면서 명령에 불복종하였던 것일까요?

명령에 불복종하였던 영주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라는 인물이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처조카이자 양자이기도 했죠.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정유재란 때 발생한 미쓰나리와 히데아키의 갈등으로 거슬러 넘어가야 합니다.

 

당시 감찰관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의 눈에 젊은 히데아키의 행동은 이시다는 히데아키가 눈에 거슬렸습니다. 히데아키의

풍행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즉각 보고하게 됩니다. 도요토미는 이에 대해 히데아키의 특권과 토지를 상당 부분 몰수합니다. 이런 사건으로 인해 히데아키는 도요토미 편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히데아키는 반대로 이시다 미쓰나리를 공격하기 시작하며 세키가하라 전투는 승리자가 보이기 시작하자 미쓰나리 측 다른 영주들도 뒤이어 배신하게 됩니다.

 

임진왜란으로 유능한 부하들과 장수를 잃었던 영주들 입장에서 상황도 불리해지고 전쟁이 오래되어봤자 이득이 없다 판단하였기 때문이죠. 이렇게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쿠가와의 완벽한 승리로 끝이 납니다. 본격적인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죠. 1603년 도쿠가와막부를 열고 쇼군으로 즉위 도쿠가와는 실질적으로 일본을 지배하게 됩니다.

에도 막부 시대이며(1603년~186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 통일 후 에도(도쿄의 옛 지명)에 수립한 무사 정권입니다.

 

 

7. 에도 막부시대 도쿠가와 이에야스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반대편에 섰던 영주의 토지를 몰수하거나 먼 곳으로 밀어내고 자신의 세력을 에도를 중심으로 재구성하며 권력을 집중시킵니다. 이후 도요토미 가문은 여러 영주 중 하나로 전락합니다.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오사카성을 2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공격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패배 이후 가문 또한 멸망합니다.

한편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쟁과 내전으로 지친 민심 수습에 만전을 기합니다.

떡을 만들고 있는 3명의 전국시대 인물 출처 유튜브

전국시대와 임진왜란을 이어나가던 이전과는 다르게 평화의 시대가 일본에 도래하게 됩니다. 후세에 세 인물의 상황을 묘사한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절구에 떡을 찧는 인물은 오다 노부나가, 떡을 반죽하는 인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들과는 다르게 떡을 편안하게 먹는 인물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세명의 성격을 보여주는 재밌는 그림이죠.

 

오다 노부나가가 힘들게 절구질하며 혼란스러운 전국시대를 평정하였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 통일이라는 떡을 빚었으나 오다와 도요토미의 시대는 완성되지 못하고 막을 내렸습니다. 결국 새로운 시대를 완성한 인물이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그가 남긴 말이 있습니다.

"가장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한 자야 말로, 결국 가장 크게 성공한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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