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핵폭탄 개발에 원인을 제공한 나라
미국의 핵폭탄 개발에 원인을 제공한 나라는 어디일까요? 바로 유럽에 있는 독일입니다. 당시 악마의 화신이라 불리는 히틀러의 손에 핵무기가 들어갈 수 있다는 소식이 유럽과 미국에 퍼지기 시작합니다. 1938년 유럽에서 우라늄 원자핵 분열 실험에 성공하였고 핵무기라는 새로운 무기가 독 일손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던 과학자들은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상대성이론의 주인공인 아인슈타인에게 이 사실을 미국에 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당시 미국에는 뉴딜 정책으로 유명한 루스벨트(1882~1945)가 대통령이었습니다. 루스벨트는 오랜 고민 끝에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들을 포함한 당대 유명했던 과학자들을 모조리 끌어모아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맨해튼 프로젝트이며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핵심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2. 맨해튼 프로젝트의 핵심
이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필요한 핵심은 무엇이었을까요? 보안과 속도였을까요? 비슷합니다만 정답은 히틀러보다 먼저 만드는것이었습니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트루먼이 백안관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고 가게 되는데요 1945년 4월
당시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가 뇌출혈로 사망하였기 때문이죠. 몇 시간 뒤 트루먼은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됩니다. 얼마 후 트루먼은 다시 놀라게 되는데 당시 부통령이었던 트루먼 또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처음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보안이 철저했다는 예시가 되겠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작명은 비밀프로젝트로써 보안을 위해 애매하고 말하기 쉬운 용어를 사용했으며, 본부를 맨해튼에서 시골 마을 오크리지로 옮겨서 비밀리에 연구를 이어갑니다. 또한 미국 전역의 약 30개 단지에서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과 참여자들 또한 가명을 사용하여 이름을 숨겼습니다. 연구 단지에 있는 청소부까지
"전쟁이 끝나도 6애월 후에야 이곳을 나갈 수 있다."라는 서명까지 해야 했으니 보안이 상당해 보입니다.
핵이라는 이름 또한 사용할 수 없었기에 더 가제트(The Gadget)라는 코드명으로 불렀습니다.
3. 미국이 핵무기를 먼저 만들 수 있었던 이유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협상국(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vs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 등) 전선이 동부전선, 서부전선으로 양대 전선이었습니다. 양대 전선을 펼치려면 일반적으로 전선이 하나일 때보다 몇 배의 전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당시에 힘들게 전쟁했던 경험을 한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일단 소련하고는 독소 불가침 조약(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조인된 독일, 소련 양국 간의 불가침 중립 조약)을 맺고 서유럽 쪽으로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영국을 제대로 제압을 못하였기에 독일은 전격적으로 소련으로 쳐들어갑니다. 이렇게 다시 양대 전선이 되었기에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 지역 산지에서 우라늄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개발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미국이 진행한 맨해튼 프로젝트가 약 13만 명의 인원과 당시 돈으로 약 20억 달러 지금 한화로 계산하면 약 300조라고 하니 어마 무시한 프로젝트라는 것을 다시 알 수 있습니다. 당장 탱크나 총을 생산해야 했던 독일에게는 무리였습니다.
자본은 물론 멀리 떨어져 있으며 넓은 땅을 가진 미국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4.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미국이 트리니티 테스트가 있기 4년 전 하와이 오아후섬 진주만에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평화로운 하와이의 어느 일요일
머리 위로 비행기들이 한대 두 대 나타나더니 어느새 하늘을 하늘을 뒤덮습니다. 약 350대의 비행기에서 수천 발의 폭탄이진주만에 투하되었습니다. 한순간에 지상낙원이 불지옥으로 변한 1941년 12월 7일입니다. 약 350대의 비행기는 일본제국의 비행기였으며 미국 진주만에 전쟁 선포도 없이 폭격을 날린 날이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미국은 태평양 함대와 육군 항공대 전력에 큰 타격을 받았으며 약 2시간 동안 2천 명 이상이 사망, 약 300대의 비행기와 20척의 함선이 파괴됩니다. 당시 미 육군은 이동식 레이더라는 최신 발명 장비가 있었고 레이더 관측병이 비행기 수백 대가 오는 것을 보고하였지만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지휘관의 판단으로 크나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지휘관이 잘못된 판단을 한 것에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애초에 일본 제국에서 하와이까지의 거리는 약 6,300km로 너무 멀어서 중간에 발각될 확률이 높았습니다. 너무 멀었기에 물자 보급 또한 힘들었을 겁니다. 일본 또한 성공할 거라고 예상을 못했다고 하니 상황이 참 안 좋게 잘 맞아떨어진 거 같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제국은 국력 차이가 큰 미국을 공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5. 일본제국이 미국을 공격한 이유
서민교 교수님에 따르면 그 당시 종합 국력이 일본을 1로 잡았을 때 미국은 12, 군사력으로 보면 일본이 1 미국은 30이었다 합니다. 당시 태평양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일본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은 1941년 7월~8월 일본 제국의 대미 자산 동결과 석유 전면 금수조치를 단행합니다. 금수조치 해제 조건으로는 일본이 점형한 군경 철수 이권 포기, 즉 휙득했던 영토를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일본이 그랬을까요?
석유의 약 80%를 미국에 의존하던 일본에게는 심각한 상황이었고 자칫 잘못하다간 군사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올스톱이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새로운 유전 확보를 위해 동남아 지역을 노립니다. 하지만 태평양 하와이에서 미국이 떡하니 있어 동남아 진출에 방해가 되니 이참에 진주만을 공습하여 미국의 기세를 꺾어버리고 미국 내 반전여론이 있으니 협상을 통하여 해결해나가자 였습니다. 일본은 미국을 아주 제대로 오판을 하였던 거죠.
이후 미국의 태평양 전력을 박살 낸 일본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미얀마 등을 침공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유전까지 확보합니다. 미국이 가만있었던 이유는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함대를 재건하는데 6개월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일본은 다시 한번 미국을 침공하기로 하는데요 그 전쟁이 바로 유명한 미드웨이 해전입니다. 1942년 6월 일본제국은 미국 미드웨이를 침공합니다.
6. 미드웨이 해전
일본제국의 미드웨이 침공 목적은 진주만 공습으로 살아남은 미국 함대들을 모조리 끝장내겠다는 목표입니다. 그러나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미국이었으니 결국 미국 폭격기대의 급습으로 일본 제국은 항공모함 4척을 손실하며 참패를 하게 됩니다. 너무 심각한 타격이었기에 제해권과 제공권을 일본은 완전히 상실해버립니다.
7. 일본의 가미카제
가미카제는 사실 일본에서 용맹한 전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전쟁에서 소모품이 된 인간의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가미카제가 자살 공격만을 위해 설계된 것을 보고 FOOL BOMB 바보 폭탄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가미카제로 죽어야 하는 군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겉으로는 천왕을 위해 숭고한 희생이라고 포장하지만 자신이 왜 죽어야 하지? 두려움에 떨었다고 합니다.
목격자에 의하면 그들은 도살장에 끌려온 양과 같았다. 어떤 이는 서 있을 수조차 없어서 지상요원들이 비행기에 밀어 넣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가미카제의 선발 조건은 무엇이었을까요?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공군 파일럿을 육성하는 것은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당시 투자할 자원이 부족했던 일본 제국은 소년 비행병 학교를 통해 약 3~6개월 교육 후 바로 전장에 투입시켰습니다.
8. 항복을 하지 않는 일본 제국
이렇듯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 후 모든 주도권을 상실하면서도 카미카제라는 미친 광기를 보여주는 일본 제국은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며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미국 대통령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 핵폭탄 투하로 이 전쟁을 종결시키려고 하죠. 이렇게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살상 무기 리틀보이가 등장하게 됩니다.
9. 히로시마 그리고 리틀보이의 등장
핵폭탄 리틀보이의 투하지역을 히로시마로 정한 미국은 길이 3미터 무게 약 4톤으로 '리틀보이'를 탑재한 폭격기 '에놀라 게이'를 남태평양 티니언섬에서부터 히로시마로 출격합니다. 왜 하필 히로시마였을까요? 그 이유는 폭격 전과 폭격 후를 비교하기 위해서입니다. 핵무기 투하 이전 도쿄 대공습 등 수많은 도시들을 폭격하였는데 그중 히로시마가 멀쩡하였기에 좋을 실험대상이기도 한 것이었죠. 특히 조선소, 비행장, 항공기 부품 공장 등 군사적 목표물 또한 있었으며 대륙 침략의 전진기지였기에 핵폭탄 투하 후보지에 올랐습니다.
일본은 미국의 공습을 몰랐던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니오입니다. 일본 레이더 범위에 미국 폭격기가 들어오자 바로 경보기를 울렸지만 곧바로 중단합니다. 왜냐하면 단 4대만 왔기에 정찰기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보통 공급을 하면 수백 대가 와서 하였기에 그렇게 판단하였죠. 그렇게 대낮 태양보다 더 환하게 빛이 히로시마 전역을 삼켜버립니다.
10. 핵폭탄 터지는 과정
맨 처음으로는 번쩍 빛이 퍼집니다. 그리고 소리가 쾅! 그 뒤를 잇는 뜨거운 열이 몰려옵니다. 폭발 직후 태양 흑점 온도와 비슷한 약 4,000도의 열 폭풍일 밀려오죠. 온 건물은 무너졌으며 사람이 아닌 것 같은 형체들이 널브러졌고 끔찍하게 녹아내린 피부를 한 사람들의 고통의 절규가 이어졌습니다. 1945년 말까지 원폭으로 약 14만 명이 사망합니다. (출처 : 히로시마평화기념자교관)
11. 핵무기 투하에도 일본 제국이 항복하지 않은 이유
1945년 2월 당시 수상을 2번이나 역임하였던 고노에 후미마로가 일왕에게 항복하자고 건의를 합니다. 하지만 천왕은 지금은 우리가 불리한 상황이니 여기서 항복하면 그 조건은 우리에게 가혹할 것이다. 그러니 전세가 한 번이라도 뒤집혔을 때 좀 더 유리한 상황에서 유리한 협상을 하자라며 항복 거부를 합니다. 그 후 나가사키 상공 약 600m에서 팻맨이 폭발하였으며 약 4만여 명이 즉사합니다.-출처-나가사키 원폭 자료관
12. 방사능 피폭
이후에 1945년 말까지 부상 및 질병으로 7만여 명이 사망합니다. 끔찍하게도 열화상으로 목이 타들어가는 상황 속 하늘에서는 화재로 생긴 먼지와 그을음이 한데 뒤섞여서 하늘에서 검은 비가 쏟아집니다. 목이 너무 말랐던 사람들은 그 검은 비를 마십니다. 방사능은 냄새도 맛도 색깔도 촉감도 없기에 너무나 목마르고 아팠기에 사람들은 모르고 방사능을 마셨습니다. 그렇게 피폭자의 수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죠. 피폭자들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13. 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
이런 끔찍한 상황을 겪고서야 일본 제국은 공식적으로 항복을 합니다.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의 무조건 항복 선언과 함께 일본 제국의 패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을 맺습니다.
14. 핵폭탄으로 피해를 많이 본 나라는 어디일까?
핵폭탄으로 첫 번째로 피해를 본 나라는 당연히 일본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피해를 본 나라를 다들 알고 계신가요? 바로 한국입니다. 당시 한국인 사망 추정자로는 약 4만여 명입니다. 피해자는 7만여 명에 달합니다. 한국인이 핵폭탄으로 많은 피해를 본 이유는 당시 히로시마는 산업 도시였으며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식민지란 이유로 노동력을 착취당해야 했던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던 것입니다. 나가사키 또한 비슷한 이유로 많았습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핵폭탄 투하 이후 방사능 처리를 조선인들이 다하였기에 피폭자수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강제노역을 하여야 했습니다. 방사능이 무서운 이유는 한 예시로 알 수 있습니다. 한 70대 할아버지 50대 아버지 30대 아들이 있습니다. 70대 할아버지는 이미 피폭을 맞아 몸에 큰 혹도 있고 말도 못 했죠. 아들은 괜찮았으나 30대 손자가 할아버지와 같은 증세를 보였습니다. 당대에 끝나지 않고 유전으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죠.
15. 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의 전후처리와 3*8선과 휴전선
일본 패전 이후 미국, 영국, 소련의 지지자들은 크림반도에 있는 얄타 지역에 모입니다. 1945년 2월 각 수상이 모여 회담을 합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을 개일 전쟁에 어떻게서든 끌여들이고 싶었습니다. 결국 독일과의 전쟁이 끝난 2~3개월 뒤에 대일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스탈린은 약속을 합니다. 독일과의 오랜 전쟁에 너무 지친 소련군이었기에 시간을 끌었던 것이죠.
하지만 핵폭탄 투하 후 일본 제국의 패전이 확실시될 때쯤 다급해진 스탈린은 즉각 대일 전쟁 참전을 결정합니다. 이후 동아시아에서 영향권을 가지고 싶었던 소련은 미국에 급히 어떤 제안을 하는데요 무슨 제안이었을까요? 바로 38도선을 그어 한반도를 분할 통치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6*25 전쟁 이후 생긴 선은 휴전선이 되겠습니다. 38도선은 직선이며 휴전선은 전쟁을 하면서 굴곡이 있는 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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