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사

오스만 제국의 후퇴와 세르비아 독립

by 유니 히스토리 2022. 8. 12.
반응형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튀르크 전쟁으로 후퇴하기 시작하며 세르비아를 독립한다. 한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는 기득권을 내려놓으며 통합을 추구하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등장하고 그가 '주장한 것이 대 오스트리아 합중국'이다.

오스만 제국의 후퇴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끝나고 1878년 독일과의 베를린 조약으로 슬라브계 민족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세르비아와 헤르체고비나 지역을 상실하게 되며 후퇴하기 시작한다. 이 당시 세르비아는 독립한 반면 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병합되었다. 한편 프랑스혁명이 전 세계로 퍼지면서 세르비아 왕궁에도 민족주의의 열망이 꽃피우기 시작했고, 그 열망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에게 전달되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대 오스트리아 합중국'

당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실질적인 황태자였으며, 1906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복잡한 민족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대 오스트리아 합중국'론을 제창했다. 이는 여러 민족에게 독일계, 헝가리계와 동등한 주권을 부여해 대우를 보장하는 연방제 형태였다.

 

당시 제국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국방, 외교, 재정을 제외하면 사실상 별개의 국가나 마찬가지인 이중제국의 형태였는데 이를 각 민족 단위로 확대하는 안이었다. 독일계(오스트리아)와 헝가리계 민족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반발이 있었지만 반대로 소수 민족인 이탈리아계, 슬라브계, 루마니아계 민족들에게는 큰 지지를 받았다. 당시 독일계의 인구는 25%, 헝가리계를 합쳐도 50%인 제국 입장에서는 프랑스혁명으로 인한 민족주의 열풍 때문에 제국을 존속시키는 데에 어쩔 수 없는 정책이었다.

 

대인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대공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대공은 군사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하필이면 그날을 1914년 6월 28일로 잡은 것이었다. 이날은 황태자의 14주년 결혼기념일이기도 했지만 세르비아 인들에게 치욕인 동시에 영광의 날로 1389년 암셀 펠트 전투에서 패배하여 세르비아 왕국이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날이자, 제2차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 군대가 튀르크 인들에게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어 과거의 패배를 갚아준 날이기도 했다.

 

'젊은 보스니아'는 검은 손과 협작 하여 프랑츠 대공을 암살하기로 한다. 이렇듯 독일계와 황실의 기득권도 내놓는 대인배스런 모습을 보여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대공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