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세기 말 고구려 전성기 광개토 대왕의 영토 확장
4세기 말에 즉위한 광개토 대왕은 소수림왕의 체제 정비를 바탕으로 중국 위. 진 남북조의 혼란기를 틈타 정복 활동을 펼치며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습니다. 서북쪽으로는 후연과 거란을 격파하고 동쪽으로는 숙신과 동부여를 굴복시켜 요동 지방을 포함한 만주 남부 지방과 두만강 하류 유역까지 차지하였습니다.
또한, 아신왕이 다스리던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 지역을 차지한 광개코 대왕은 신라 내물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신라에 침입한 왜를 물리쳤으며 왜와 우호적인 금관가야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는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호우명 그릇에서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광개토 대왕은 광활한 영토 확장의 결과로 만주와 한반도 중부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고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강력한 왕권과 자주성을 표현하였습니다. 이 전성기가 더 오래가서 삼국통일도 성공하고 왜를 속국으로 둔 상태로 중국 통일 국가랑 전쟁을 했으면 어땠을까 상상도 해봅니다.
2. 광개토 대왕의 아들 장수왕의 남진정책
광개토 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장수왕은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광개토 대왕릉비를 건립하였습니다. 비문에는 고구려의 건국신화, 광개토 대왕의 영토 확장과 왜군의 격퇴 과정, 묘지기(수묘인)에 대한 규정이 기록되어있습니다.
5세기에 즉위한 장수왕은 중국이 남조와 북조로 분열된 상황을 이용하여 실리를 추구하는 외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또한, 국내성을 기반으로 한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고자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대부분 평양 천도 이후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방 교육 기관인 경당에서는 청소년들에게 한학과 무술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장수왕은 천도 후 475년 백제를 공격하여 개로왕을 죽이고 수도 한성을 함락시켜 남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산만에서 죽령, 경북 동해안을 연결하는 지역까지 영토로 확장할 수 있었는데, 이 사실은 충주 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광개토 대왕능비랑 헷갈리지 마세요)
충주 고구려비는 장수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의 비석입니다. 이를 통해 고구려의 남한강 유역 진출을 확인할 수 있고, 신라를 '동이(동쪽 오랑캐)' 신라의 왕을 '매금'으로 표현한 것을 통해 장수왕 시기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성장은 백제와 신라의 위축으로 이어졌습니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였고, 신라와 동맹을 맺어 대응하였습니다. 신라 역시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며 백제와 화친하는 등 고구려의 남진 정책을 경계하였습니다.
3. 5~6세기 문자왕 부여 정복 및 나.제동맹과 전쟁 후 고구려 최대 영토
장수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자왕은 494년 부여를 병합하며 부여의 왕과 일족을 고구려에 편입시켰습니다. 또한, 나. 제 동맹을 맺은 신라. 백제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최대 영토를 확보하였고 광개토 대왕, 장수왕의 업적을 이어 고구려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5세기에 만주와 한반도 중부에 이르는 강대국으로 성장한 고구려는 왕을 '태왕'이라고 부르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 중국과 대등한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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