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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중국 오나라와 고구려의 동맹

by 유니 히스토리 2022.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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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한 말 황건적의 난 그리고 요동 군 공손탁 세력

후한 말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면서 중원 지역은 큰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이때 요동 군 출신 공손탁이 요동 태수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후한 조정이 멀리 떨어진 변경에 신경 쓸 수 없는 상황을 간파하고 요동 지역에서 세력을 키웠습니다.

삼국지 요동 군 출신 공손탁 이미지 출처 유튜브

 

2. 공손씨 세력에게 동맹을 제의하는 오나라

하지만 220년 후한이 멸망한 뒤 조조의 아들 조비가 세운 위나라가 화북 지역에 들어서며 주변 세력들을 하나둘씩 정리하자 공손씨 세력은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불안감이 엄습하던 때쯤 229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공손씨 세력에게 손을 내민 자가 있었으니 이는 바로 남쪽 오나라의 손권이었습니다. 손권은 위나라를 배후에서 함께 공략하자는 동맹을 제안하며 요동으로 사신을 보내왔던 것이었죠.

삼국지 지도 출처 유튜브

당시 요동을 집권하고 있던 공손탁의 손자 공손연은 오나라와의 동맹이 위나라에 알려질 경우 위군이 요동을 정벌하러 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빠졌습니다. 그리하여 판단을 보류한 채 오나라에 사신을 보내 담비 가죽과 말을 바치며 신하임을 자처하였습니다. 오나라의 손권은 공손연이 보낸 사신이 도착하자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이에 동맹을 기정 사실화하고 진귀한 보물과 함께 대규모의 사절단을 요동으로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장소를 비롯한 오나라의 대신들은 공손연이 갑자기 오나라에 비협조적이거나 위나라와 친선을 도모할 경우 멀리 떨어져 있는 오나라로서는 응징할 방법이 없다며 결사반대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강하게 밀어붙이는 손권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손권의 생각대로 대규모 사절단은 여러 척의 배를 나눠 타고 요동으로 출항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 앞에는 크나 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3. 오나라 사설단의 비극과 고구려와동맹

 

233년 400명의 사신들과 호위 군사 1만 명으로 이루어진 오나라 사신단은 긴 항해 끝에 요동반도에 상륙하였습니다. 마중을 나온 공손연측 사절은 오나라 군대는 해안가에 머무르게 하고 400여명의 사신 일행만을 데리고 양평 지역으로 떠났습니다. 한편 고향땅에서 만리나 떨어진 낯선 해안가에 머물던 오나라 장병들은 사흘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지휘부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한 채 무작정 기다려야 했습니다.

오나라 사절단 출처 유튜브

그러던 어느날 밤 갑자기 한 무리의 군사가 오나라 군영을 기습 공격하였습니다. 오군은 황급히 진영을 갖춰 대응하였지만 상당한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적군이 점점 더 많이 몰려오자 결국 오군은 바닷가에 정박해 있던 자신들의 배에 올라 허겁지겁 요동반도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군을 덮친 괴한들은 공손연이 보낸 군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공손연을 만나러 간 오나라 사절단은 이끌던 장미와 허안은 양평에 도착하자마자 참수 당한 후였습니다. 국제정세를 살피던 공손연이 위와 친선을 도모하려 하였기 때문이었죠. 우두머리를 잃은 오나라 사절단 400여 명은 여러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져 감옥에 갇혔습니다. 하지만 진단과 황강은 관리가 소홀했던 틈을 타 탈출할 수 있었고 추격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동쪽으로 하염없이 이동하였습니다.

 

해어진 옷차림에 엉망인 몰골로 들판과 산속에서 과일 나물 등을 채집해 먹으며 밤중에 몰래 이동한 진단과 황강은 거지와 다름없는 행색으로 공손씨 세력의 동쪽 끝에 다다랐습니다. 이들이 국경의 건너편에 이르자 중국의 성곽과는 사뭇 다른 형태인 견고한 형태로 들여쌓은 성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황급히 달려가서 문을 열어 달라고 소리를 지르자 잠시 후 성문이 열리고 관리들이 나타났습니다.

고구려 관료 이미지 출처 유튜브

그들은 머리에 새 깃털로 장식한 모자를 쓰고 붉은 바탕에 알록달록한 무늬가 긴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습니다. 동맹을 맺기 위해 떠났던  오나라 사절단은 우연찮게 고구려에 도착합니다.

고구려 이미지 출처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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