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구려 건국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끄는 부여 계통 이주민과 압록강 유역 졸본 지방의 토착 세력이 결합하여 건국되었습니다. 고구려는 부여처럼 5개 부족이 연합한 연맹 왕국으로, 각 부가 각자의 주민과 영역을 다스렸습니다. 5 부족은 계루부, 절노부, 소노부, 관노부, 순노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2. 고구려 정치 및 제도
고구려는 부여와 마찬가지로 왕 아래에 상가, 고추가, 패자 등의 제가(대가)들이 있었고,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를 거느렸습니다. 대가들은 나라의 중대한 일은 제가 회의를 통해 합의로 결정하였는데 회의의 수장을 대대로 또는 막리지라 불렀습니다. 고구려는 부여와 마찬가지로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형사취수제(형사취수혼)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또한, 신랑이 혼인하여 신부의 집 뒤에 작은 별채(서옥)를 지어 생활하다 자식이 장성하면 처자식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일종의 데릴사위 제도인 서옥제가 있었습니다.
3. 고구려 제천행사
고구려는 국내성에서 동쪽으로 17km 떨어진 산 중턱에 자리 잡은 '국동대혈'이라는 동굴에서 건국 시조인 주몽과 그의 어머니 유화 부인을 섬겨 제사를 지냈습니다. 또한, 추수가 끝나는 10월에 제천 행사인 '동맹'을 열었는데 제천 행사는 하늘에 풍요를 기원하는 동시에 온 나라 사람들이 음식과 함께 노래와 춤을 즐기는 화합의 자리였습니다.
4. 고구려 약탈 경제
고구려가 자리 잡은 압록강 유역의 졸본 지역은 산간지역으로 농토가 적어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넉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일찍부터 주변 부족을 약탈해 생계를 유지하는 약탈 경제 활동을 하였고 곡식은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창고에 저장하였습니다.
그러한 탓에 고구려는 일찍부터 주변 지역을 정복하는 방식으로 평야 제대로 진출하고자 하였고 사회 기강을 유지하기 위해 형법 적용을 엄격히 하였습니다.
5. 고구려 법
고구려는 부여와 마찬가지로 도둑질한 자는 물건 값의 12배를 배상하게 하는 1책 12법이 있었습니다. 죄가 있으면 제가들이 의논한 후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습니다. 또한, 반역을 꾀하거나 일으킨 자는 화형에 처한 뒤 다시 목을 베었고, 마찬가지로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습니다.
6. 고구려 지배층
고구려의 지배층은 왕족인 고씨를 비롯하여 5부 출신의 귀족들이 차지하였는데, 이들은 지위를 세습하면서 관직을 독점하여 국정을 운영하였습니다.
7. 고구려 1세기 초 유리왕
고구려는 1세기 초 유리왕 때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기며 세력을 확장하였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치며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국가 체제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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