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멸망 후 한반도에는 어떠 나라들이 있었을까요? 오늘은 고조선 멸망 후 한반도에 나라를 세운 부여, 옥저, 동예, 삼한 등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공부해보겠습니다. 한반도의 고대 국가 부여, 옥저, 동예, 삼한의 역사 이야기 시작합니다.
부여 소개
철기 문화를 배경으로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서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여러 나라가 등장하였습니다. 부여는 만주 쑹하강 유역의 넓은 평야 지대에 자리 잡아 농경과 목축이 발달하였고, 5부족이 연합한 연맹 왕국 형태로 성장하였습니다. 중국 군현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활발하게 교류하던 부여는 남쪽으로는 고구려, 서쪽으로는 선비족과 접하고 있었습니다.
왕 아래에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가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로 불리었고 사출도라는 지역을 독자적으로 다스렸습니다. 각기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를 두었고 홍수나 가뭄으로 흉년이 들면 그 책임을 물어 왕을 폐위시키기도 하였으며 나라의 중대사는 회의를 통해 결정하였습니다. 부여는 지배층인 대가, 호민과 피지배층인 하호(일반 농민), 노비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부여는 고조선만큼이나 엄격한 법을 시행하였는데, 살인한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습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12배를 배상하는 1책 12 법이 있었으며,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부여에는 왕이 죽으면 사람을 함께 묻는 순장, 그리고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형사취수제(형사취수혼)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부여는 농경과 묵축이 발달한 반농 반목 생활을 하였고, 특산물로는 말과 주옥, 모피 등이 있었습니다. 부여에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소를 죽여 발굽이 갈라지는 모양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우제점법이 있었습니다. 또한, 12월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어 하늘을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 농사의 풍요와 성공적인 사냥을 기원하였습니다. 부여는 1세기 초 왕이란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독자적인 사회문화를 이어가던 부여는 3세기 말 선비족의 침입으로 쇠퇴하였고, 마침내 5세기 말 고구려에 흡수당하며 연맹 왕국 단계에서 멸망하였습니다. 부여는 만주 지역에서 발달한 나라였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세력이 부여의 한 계통임을 자처하였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뿌리라 할 수 있습니다.
옥저 소개
한반도 고대국가인 함경도 동해안 지방에서 일어난 옥저와 강원도 북부 동해안에 위치한 동예는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였습니다. 이들은 부여, 고구려와 달리 왕이 없었고, 읍군, 삼로라 굴리는 군장이 자기 부족을 다스리는 군장 국가였습니다. 옥저는 토지가 비옥하여 농경이 발달하였고, 어물과 소금 등 해산물이 풍부하였습니다. 옥저에는 어린 여자아이를 남자의 집에서 키우다가 성인이 되면 예물을 주고 아내로 맞이하는 민며느리제라는 혼인 풍습이 있었습니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 가매장을 한 뒤 뼈만 추려 가족 공동 무덤인 나무 덧널(목곽)에 넣어 두고 입구에 쌀을 담은 질그릇을 매달았습니다. 동예인들은 철자형, 여자형 집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동예 역시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였는데 특히 단궁, 과하마, 반어피 등의 특산물이 많이 생산되었습니다. 반어피는 바다표범의 가죽을 말하고, 과하마는 말을 타고 과일나무 밑을 지날 수 있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키가 작은 말을 뜻합니다.
동예에서도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고, 산천의 경계와 부족의 독립적 성격을 중요시하여 마을끼리 함부로 침입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침범하면 노비나 소, 말로 배상하게 하는 책화의 풍습이 있었으며 공동체적인 질서를 중시해 같은 동족끼리 혼인하지 않는 족외혼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옥저와 동예는 나름대로의 세력을 유지하였지만, 고구려와 낙랑에게 압박을 받았고, 동해안에 치우친 지리적 여건 등을 이유로 선진 문물 수용에 불리하여 연맹 왕국으로 발전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고구려에 특산물을 바치며 연명하다 옥저는 1세기에, 동예는 5세기에 고구려에 복속되었습니다.
진 소개
한편, 한반도 중 남부 직역에 위치하였던 진은 중국과의 교역 과정에서 고조선의 방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후 한나라의 압력을 받으며 고조선 사회가 혼란을 겪자, 한반도에는 이를 피해 남쪽으로 이동하는 유민들에 의하여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었습니다. 고조선의 문화는 토착 문화와 융합되었고, 이를 통해 사회가 더욱 발전하였습니다. 그 결과 마한, 진한, 변한이 성립되어 이들은 삼한이라는 연맹체로 성장하였습니다.
현재의 천안, 익산, 나주 지역을 중심으로 경기, 충청, 전라도 지방에서 발전한 마한은 백제국을 비롯한 54개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마한의 여러 소국 가운데 가장 강성했던 목지국은 진왕이 지배자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를 이끄는 주도 세력이 되었습니다. 대구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진한은 사로국을 포함한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김해 창원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변한 역시 구야국을 포함해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삼한은 고조선과 달리 제정 분리의 사회였습니다. 신지 견지, 부례 읍차 등으로 불리는 정치적 지배자인 군장이 각 소국을 다스렸고, 종교적 지배자인 천군은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였습니다. 삼한에는 천군이 다스리는 소도라 불리는 신성 지역이 있었는데, 소도는 군장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여 죄인이 이곳으로 도망을 가면 군장이라도 잡아갈 수 없었습니다.
삼한은 비옥한 평야 지대에 자리하여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하였습니다. 특히 철제 농기구를 이용하여 벼농사를 많이 지었으며, 해마다 씨를 뿌리고 난 5월과 추수를 마친 10월에는 계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또한, 농경을 위한 공동 조직인 두레가 있었고, 남녀가 문신을 새기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삼한 시대에는 밭이나 논 뿐만 아니라 수로, 보 , 저수지 등을 축조하였는데, 대표적인 저수지로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 등이 있습니다.
한편, 마한, 진한, 변한의 지역별 특징을 살펴보면 마한에서는 초가지붕이 있는 토실(흙방)에서 생활하였고, 진한과 변한에서는 영혼이 새처럼 날아오르기를 기원하며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여 장례를 치렀습니다. 또한,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덩이쇠'를 화폐처럼 사용하였고, 풍부한 철을 낙랑, 왜 등으로 수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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