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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강감찬 장군 업적과 귀주대첩의 과정과 결과를 알아보자.

by 유니 히스토리 2024.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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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장군은 고려 제3대 정종 금주에서 태어나 제2차 거란 침공에서 활약을 시작으로 3차 전쟁에서는 거란의 10만 대군을 귀주에서 크게 이겨 고려를 지킨 위인이다. 오늘은 그의 업적과 귀주대첩의 과정과 결과를 알아보자.

 

강감찬 장군 업적

발해를 멸망시키고 유목민족들을 통일시키고 성장한 거란 혹은 요나라라고 불리는 거대한 유목제국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거란은 당시 중원을 통일한 송나라에게 크게 이겨 조공까지 받으니 그 기세가 엄청났는데, 중원대륙을 완전히 통일하기 위해 후방에 있는 고려를 완전히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1010년 거란의 성종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오니 고려의 신하들을 겁을 먹고 현실과 타협하여 땅을 내주는 할지론을 시작으로 항복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때 반대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강감찬 장군이다. 흥화진을 시작으로 아직 고려는 싸울 힘이 있고 겨울이 지나면 다시 가축을 보살펴야 하는 거란은 시간이 촉박하니 고려의 황제께서 몽진, 즉 남쪽으로 피신을 하면 승산이 있다고 한 것이다. 남들이 다 항복을 논할때, 아군의 상황과 적군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이에 고려 황제 현종을 몽진을 하여 시간을 끄는 한편, 고려판 이순신이라고 불리는 흥화진 장수 양규의 활약으로 제2차 거란 침공을 막아내었고 3차 침공을 대비하는 시간까지 준비하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강감찬
강감찬

 

고려 거란과의 1차 전쟁은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여진의 활동지역이던 강동6주를 거란의 방해 없이, 오히려 도움을 받으며 가질 수 있었고 이는 2차 전쟁에서 활약하는 양규에게 큰 도움이 되는 철벽의 방어선이 되었다. 이후 3차 전쟁이라고 학교에서 배우지만 그 사이에 3~4번에 달하는 침공이 있었다. 거란의 병사 규모는 3~8만 사이로 보고 있으며, 이때는 거란이 흥화진을 비롯한 강동 6주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으로 작은 성과조차 보지 못하였다.

 

귀주대첩 과정

이런 저런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거란은 최정예 10만 기병대를 조직하여, 소배압이 고려의 수도 개경까지 돌격하게 되는 도박적인 전격전을 하는 배경이 되었다. 여러 침공으로 고려는 수도까지 성보수를 더 견고히 하여 뚫리지 않게 되자, 소배압은 후퇴를 하였고 딱 한 곳만 지나가면 되었는데 거기가 바로 귀주이다. 이를 잘 알던 강감찬은 고려 군사 20만을 모아 대회전을 치러 대승을 거두니 이를 귀주 대첩이라고 하며, 살아서 거란으로 간 사람이 수천 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귀주대첩 결과

거란의 최고명장이자, 발해를 멸망시키고, 송나라와도 싸워 이겼던 소배압은 아이러니하게도 고려한테 번번히 패배하여 흑역사를 가지게 되었고 분노한 거란 성종한테 죽을 뻔했지만 그간의 공을 생각해 조용히 지내다 늙어 죽는다. 이후 고려는 10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평화를 누리고 군사적 대외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하며, 전 세계에 고려의 존재를 알리니 그 이름이 바로 KOREA이다.

낙성대-강감찬-기마상
낙성대-강감찬-기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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