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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간도참변(경신참변) 배경 원인과 결과 그리고 조선인 대학살

by 유니 히스토리 2022.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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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간도 참변에 대해서 얼마나 아시나요? 저는 고등학교 때 일본군이 간도에 있는 무고한 조선인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간도 참변이 왜 발생하고 결과는 어찌 됐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간도 참변

간도 참변은 1920년 10월 ~ 1921년 4월 일제는 만주의 관동군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제국 군대까지 합류시켜 대규모로 간도로 보냈습니다. 명목은 조선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간도에 거주 중인 민간 조선인들을 무차별하게 대학살 한 사건이며, 청산리 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연달아 참패한 것에 대한 보복입니다.

간도 참변

간도 참변 배경 원인

1919년 3월 1일 조선에서는 만세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 만세 운동은 3월 1일에 시작되어 삼일 만세 운동으로 부릅니다. 만세 운동은 평화적인 비폭력 만세 운동이었지만 일본군은 비무장 조선인들을 총과 칼로 진압하였습니다. 이후 일부 독립군들은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무장투쟁을 준비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수많은 독립군 양성기관과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었습니다.

 

이후 무장 독립군 세력들은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에 커다란 타격을 주는 등 활발한 게릴라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들을 지켜볼 수 없던 일본제국은 위협과 회유를 사용하여 만주의 중국 군벌까지 일본제국편으로 끌어들여 합동으로 독립군 토벌작전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저항과 중국 군대의 비협조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됩니다.

 

간도 참변 결과 조선인 대학살

1920년 6월 7일 봉오동전투에서 독립군에게 전멸에 가까운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한 일본제국은 정규군들을 만주에 직접 투입하여 일거에 독립군을 소탕할 계획을 세우는 한편 일본군의 출병을 정당화할 음모를 꾸몄습니다. 만주 진출을 위한 조사를 진행 중이었던 일본제국군은 같은 해 8월 간도지역 불령선인 초토 계획을 세우고, 출병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중국 마적을 사주하여 10월 2일 훈춘현에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조선인들에게 죄를 덮어 씌웁니다.

 

훈춘사건을 명분으로 내세운 일본제국은 10월 7일 대규모의 병력을 간도로 출병을 결정하고 10월 12일 간도 출병을 시작합니다. 일본군은 항일운동 근거지를 중심으로 초토화 작전을 진행하다가 10월 20일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작전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독립군은 일본군이 공격해 오기 힘든 산속 또는 중*소 국경지대로 미리 이동하였기에 일본군의 독립군 토벌작전은 큰 성과 없이 진행됩니다.

 

한편 10월 21일부터 26일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초토화였습니다. 일본군은 1921년 4월까지 수많은 조선인 마을을 대상으로 방화 및 약탈을 하였으며 보이는 조선인들을 모두 죽인 대학살을 가리켜 '간도 참변 혹은 경신참변'이라고 합니다. '독립신문'에 따르면 간도 참변으로 조선인 3,700여 명이 사망하였습니다.

간도 참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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