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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한산도 대첩 소개 및 과정 그리고 결과, '와키자카의 일화'

by 유니 히스토리 2022.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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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대첩 소개

한산도 대첩은 견내량 대첩으로도 알려졌으며 임진왜란 중 벌어졌던 이순신의 승전 중 하나로,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유명하다. 또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강감찬의 귀주 대첩과 나란히 한국사 3대 대첩에 포함되고 있다. 한산도 대첩은 평양까지 진격한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의 추가 보급 및 병력 지원을 끊어 진격을 멈추게 하였다.

이순신

 

한산도 대첩 과정

1592년 선조 재위 25년, 5월과 6월 사이 2차 출동을 통해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수군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로 이어지는 일본 함대를 상대로 압도적으로 토벌하였다.

 

일본군이 조선 수군에 의해 다시 동쪽으로 밀려버리는 것을 걱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6월 23일 용인에서 주둔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다시 해안으로 급파하고, 오다 노부다가 시절부터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구키 요시타카와 그 외 가토 요시아키 등 3인을 소집하여 군대를 조직해 조선 수군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8월 12일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더불어 경상 우수사 원균의 함대 등 총 55척이 노량에서 합류하며 조선군은 일본군에 대비하였다. 여담으로 원균은 임진왜란 발발 초기에 자침 시킨 경상 우수영 판옥선만 해도 편제기준 70여 척, 기록상 56척 이상이다.

 

한산도 대첩 전투

거북선

6월 14일 구키 요시타카를 중심으로 일본 수군은 부산포에 집결했지만, 이미 용인 전투를 통해 조선군은 약하다고 판단하여 와키자카는 자신의 함대만을 이끌고 거제도로 7월 7일 단독으로 출격하였다. 그날 저녁 무렵에 왜선 70여 척이 견내량에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보고받은 조선 수군은 8일 한산도 근해에서 이를 확인하였다.

 

일본 함대는 대선이 36척, 중선이 24척, 소선 13억 등 모두 73척으로 조선군으로써는 일본군 함대를 포위 섬멸하는 형태를 치르기에는 견내량 주변이 협소하고 암초가 많은 데다 조류의 흐름도 역류여서 판옥선이 서로 부딪칠 가능성이 있어 큰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조선군은 포위 섬멸 작전을 포기하고 함대 간의 전면전을 준비한다.

 

조선군은 대여섯 척으로 구성된 소규모 함대를 미끼조로 투입하여 일본군 함대를 건져내는 유인책을 보여주었다. 일본 장수 와키자카는 이전에 1,500명으로 조선군 5만 명을 격퇴한 용인 전투로 인해 조선군을 만만하게 보았고 매복을 의심하지 않고 조선수군을 추격해 넓은 바다로 진입하였다. 이에 이순신의 명령에 따라 한산도 좌우의 섬에서 기다리던 전함들이 3개 부대로 나뉘어 학익진을 형성하여 일본 수군을 상대로 포위한 뒤 십자포화로 일본군을 괴멸시켰으니 이를 한산도 대첩이라고 한다.

 

한산도 대첩 결과

한산도 대첩의 결과 일본군은 참패를 겪고 이틀 뒤인 16일 안골포 해전에서 뒤따라 출격한 구키 요시타카의 각개격파를 당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총 100척 이상의 달하는 일본군 대함대가 고작 3일 만에 수장당하는 굴욕적인 대참패하게 된다.

 

한산도 대첩 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의 전투에서 큰 의미를 찾기 힘든 것을 알아차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 대신 해안선 방어를 하라는 뜻에서 '해전 금지령'을 선포하면서 사실상 일본 수군의 무력화 및 조선 남패의 제해권을 완전히 되찾는 결과를 얻는다.

 

와키자카 일화

와키자카 후손

한산도 대첩의 결과 와키자카는 처참하게 도망 다니며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 13일간 솔잎과 미역을 먹으며 불탄 배의 널빤지로 뗏목을 만들어 육지로 오던 중 조선군에게 들켜 아군 10여 명이 사살당했으며 남은 자는 고작 200여 명 남짓이었다고 한다. 겨우 살아남은 와키자카는 아래 같은 말들이 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성급했고 적장은 침착했다. 나의 전술은 단순했지만 그의 전술은 치밀했다. 나는 적장 앞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자도, 가장 미운 자도 이순신이다. 가장 좋아하는 이도, 흠모하고 숭상하는 자도 이순신이다. 가장 죽이고 싶은 이도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자 또한 이순신이다"

 

한산도 대첩 패배 이후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패잔병들은 무인도에서 해초를 먹으며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를 기억하기 위해 한산도 대첩 패배일만 되면 미역을 먹었으며 지금까지 와키자카의 후손들은 미역을 먹으며 관습을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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